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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배에 날개가 달렸으면…늘 조국 생각'

미주 민통련 마지막 의장을 역임한 김종웅(다우너스 그로브 거주) 씨는 지난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소박한 분이셨다. 시카고에 대통령이 되기 전 3~4차례 방문했었다. ‘관광은 사치스러운 것’이라며 시카고에 오시면 늘 동포들을 만나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미주 동포들의 역할에 대해 역설하셨다”고 회고했다. 김 씨는 19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친 때부터 김 전 대통령과 절친한 동지였다”며 “82년 12월 24일 워싱턴 D.C.로 망명한 다음 해인 83년 6월 25일 처음 시카고를 방문하셨다. 그 뒤 여러 번 시카고를 방문하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시카고 한인 동포들이 정성을 모아 경제적 지원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부분의 동포들도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는 분을 위해 마음을 모았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민초들이 김 전 대통령을 후원했다. 그래서인지 김 전 대통령은 시카고 방문을 늘 즐거워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좌익이라고 낙인 찍히셨던 분이었지만 당시 그분 자신은 북한에 대해 잘 모르셨다. 시카고 첫 방문시 북한 전문가로 시카고 대학에 계셨던 고병철 박사를 아무도 모르게 만나 장시간 북한에 대해 배우셨다. 이미 시카고에 오기 전 무엇을 해야할 지 정해놓고 오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범상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며 “한 번은 공항으로 가기 전 시간이 남아 시카고 만트로스 공원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빠르게 지나가는 보트를 보면 “저 배에 날개가 있다면…”이라고 말씀하시며 멀리 시카고 다운타운의 빌딩을 바라보셨다. 늘 조국을 그리워하신 분으로 한국에서부터 시카고까지 여러 번 봤지만 그 때 만큼 내 가슴이 시려온 적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은 시카고 한인들이 어려운 가운데 정성을 모은 것에 대해 늘 감사해 하고 시카고를 편안해 하셨다”며 “그래서 시카고에 오시면 속마음을 털어 놓으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많았다. 자식들에 대해 늘 미안해하며 자신으로 인해 아들들이 고통 받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정치인이 아닌 아버지 모습으로도 시카고 한인들에게 다가오셨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을 도와주신 분들이 많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자신들에게 거리를 두셨던 김 전 대통령에 서운할 지 모르나 그분의 성품으로 봤을 때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헌신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못한 일을 김 전 대통령이 이뤄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미주 민통련 마지막 의장을 지낸 김종웅 전 의장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주 망명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경제적 후원자로, 정치적 동지로 활동해 왔다. 또한 80년대 중반 시카고에서 80년대 한국정치 현실을 알리기 위한 ‘동지’라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임명환 기자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SF 한인사회 각계 반응

김상언·SF 한인회장 대한민국 민주화의 산증인이자 상징이셨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혼신의 힘을 쏟아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전대통령의 몸은 비록 우리들의 곁을 떠났지만 고인의 정신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김이수·민주평통 SF지역 협의회장 김 전대통령은 한국 민주화에 기여는 물론 IMF 시절도 극복해내셨다. 특히 현재 한국의 상징으로 통하는 IT산업과 한류 문화도 김 전대통령 재임시 시작된 업적이다. 김 전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동수·SF 한미 노인회장 김 전대통령에게는 납치·테러·망명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IMF와 4차례의 대권 도전도 있다. 이 모두를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신 분이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스승이자 지도자를 잃었다. 너무 슬프다. 조의를 표한다. 정경애·글로벌 어린이재단 총회장 갖가지 고난과 역경을 딛고 한국의 민주화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고 서운하다. 퇴임 후에도 민족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셨는데 그 분의 빈 자리가 무척 허전할 것으로 보인다. 김근태·전 SF 한인회장 지난 1998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셨을 때 SF지역 한인회장 자격으로 김 전대통령을 환영했었다. 첫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트신 분이다. 우리 민족의 큰 어른을 잃었다는 것이 한인의 한사람으로써 허전하고 가슴 아프다. 김진덕·전 미주 호남향우회 회장 조국의 큰 어른이 돌아가셨다. 고인을 애도하며 오늘 검은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 출근을 했다. 고인은 목숨을 건 민주화 운동, 경제 한파 극복 등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평생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음이 가장 애석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지숙·모기지월드 대표 격동의 시절과 환경을 헤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에 큰 업적을 남기셨다. 또한 IMF 탈출과 남북 평화 통일 노력 등 많은 업적을 쌓은 우리 민족의 어른이셨다. 김 전대통령의 서거를 깊이 애도한다. 택장·실리콘밸리 한미 상의 이사장 대한민국 민주화를 투쟁 인사중 가장 거인이 돌아가셨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념과 불굴의 의지를 후세들에게 가르쳐주고 가셨다. 후세들은 그 분에게 영원히 빚을 진 셈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오미자·오가네 식당 대표 대한민국의 큰 별이 떨어졌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으신 대한민국 굴곡의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에 이어 한해에 두 명의 전직대통령을 잃은 것은 한민족 전체의 불운라고 생각한다. 이동영·SF 한인 상의 회장 김대중 전대통령은 격동의 세월을 이겨온 ‘인동초’셨다. 고난과 역경을 참고 이겨내신 그 분의 한 평생 삶은 세상에 남겨진 자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햇볕' 일관된 통일 정책···끝내 못이룬 통일의 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통일을 향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의 통일정책은 1970년대 야당지도자 때부터 주장해온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하는 3단계 통일론으로 압축된다. 남북정상회의를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연합을 첫 단계로 한반도 평화분위기가 성숙하면 연방제를 만든 뒤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그의 통일론이 빛을 발한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1998년 이후였다. 당선 직후 북한의 도발 불용 등 대북 3원칙을 천명하면서 햇볕정책을 과감하게 실천으로 옮긴 것. 그의 통일정책은 재임기간에도 북한 잠수정 침투와 금강산 관광객 억류 제1연평해전 등으로 난관에 봉착했지만 대북포용 정책 기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0년 3월 남북간 협력 수준을 민간에서 정부로 진전시키겠다는 베를린 선언을 하고 그해 6월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꿈에나 그리던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관광도 실현됐다. 이 공로로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햇볕정책은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에도 계승.발전되면서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퇴임 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직전 현대가 4억달러 정부가 1억달러를 북측에 몰래 건넨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이 뒤따르면서 그의 햇볕정책과 통일론은 빛이 바랜 채 미완의 숙제로 남게 됐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협력·경쟁 넘나들며 애증의 반세기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 시대가 막을 내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 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1960년대 이후 3김은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친 뒤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경쟁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힘은 3김에게 다시 정치활동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DJ와 YS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나란히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하지만 이듬해 1988년 4월 총선에서 DJ(평민당)와 YS(통일민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호남 영남 충청의 표를 결집시키면서 지역감정에 기반한 여소야대의 구도를 만들었다. 1990년 YS와 JP는 집권여당과 합당하는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YS는 여당의 대권후보를 꿈꾸고 있었고 JP는 내각제 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배를 탄 것이다. 하지만 DJ는 민자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합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고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으로 3김 정치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YS와 JP는 집권여당인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지만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 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해 3월 충청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역시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번의 승부였다. YS가 이끄는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은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139석을 얻는데 그쳤고 DJ의 국민회의는 79석 JP의 자민련은 50석을 확보했다. YS에게 쫓겨난 JP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나 DJP 공조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9월 JP는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이후 2002년 16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고 DJ는 전직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서 정계를 물러났다. 3김은 격동의 한국 정치사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지만 지역주의와 보스정치 금권정치라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3김 정치의 공과는 이제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지만 아직도 우리의 정치지형은 3김이 만든 지역주의의 견고한 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김 전 대통령 연보

1948-1950 목포일보 사장 1951- 흥국해운 사장 1951.9-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 1957.10-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1960.10-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 1961 제5대 민의원(인제) 1963- 제6대 국회의원(전남 목포) 1965- 민중당 대변인 1967- 제7대 국회의원(전남 목포) 1970- 신민당 대통령후보 1971.4- 제7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71-1972 제8대 국회의원(전국) 1974.11- 민족회복 국민회의 참여 1976-1978 3.1 민주구국선언사건 주도로 구속 1979.3-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1983-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설 1983.5- 미국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1983-하바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7.4-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19870- 평화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 1987-1991 평화민주당 총재 1987 평화민주당 대통령후보선출 1987- 제13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88-1992 제13대 국회의원(전국) 1991- 신민주연합과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 1991-1992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 1992 제14대 국회의원(전국) 1992.6-12 민주당 당무위원 1992 제14대 대통령선거 입후보 1993.12-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 1993 영국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 1994-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 아태평화재단으로 변경 1995-1998/2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1995-2001/11 국민회의 새천년 민주당 총재 1995-1997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공동의장 1997.12.18 제15대 대통령 당선 1998.2.25 제15대 대통령 취임 2000.6.13 남북 정상회담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각 당 반응은···

"위대한 지도자 잃어" ◇한나라당=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윤상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김 전 대통령께서는 일생 민주화와 인권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오셨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윤 대변인은 또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께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하며 국민과 함께 슬픔을 나눈다"면서 "생전에 이루고자 하셨던 숭고한 뜻이 국민 화합과 남북간 평화로 승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대의 스승이었다" ◇ 민주당= "당신은 진정한 이 시대의 위대한 스승이셨다"면서 "비통하고 원통하다"고 애도했다. 노영민 대변인은 논평에서 "서슬퍼런 독재의 서슬에 굴하지 않았고 경제 파탄도 거뜬히 넘어오신 당신 반세기 갈라진 채 원수로 살아온 민족이 한 동포임을 알게 해 준 당신을 보낼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다"면서 "아직도 국민들은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이 아직도 크기만 한데 당신마저 가시다니 2009년은 잔인한 한 해"라며 "편안히 가시라"고 조의를 표했다. "후대가 업적 기억할 것" ◇자유선진당 등 기타 야권=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순탄치 않았던 정치역경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셨던 김 전 대통령은 끝까지 왕성한 노익장을 보여주셨다"며 "고인이 남긴 많은 족적과 업적들은 후대의 역사가 바르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도 논평에서 "시대의 큰 별이 졌다"며 "한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화해협력에 크나큰 족적을 남기신 지도자이자 큰 어른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겨레와 함께 슬퍼하고 애도한다"고 밝혔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은 "평생을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이바지한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국민들과 함께 깊은 조의를 표한다"며 "고인의 서거를 통해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발전에 하나의 큰 교훈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LA인맥은? 인권연·호남향우회와 '끈끈'

김대중 전 대통령의 LA인맥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인권연)'에서 찾을 수 있다. 인권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3 미국 망명시절 창설한 단체로 미국 전역에 지부를 열고 DJ지원을 하던 단체였다. 이 단체와의 인연으로 이후 DJ의 분신이 되었던 박지원도 있었고 정동채도 있었고 많은 인사들이 있었다. 인권연.호남향우회 등을 매개로 김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LA인사는 총 4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대다수가 지난 80년대 초 김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의 박해로 미국으로 쫓겨와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부터 끈끈하게 연락을 취해왔다. 우선 대표적 인물이 지난 97년 대선 당시 미주후원회 회장을 맡았던 최희만 전 LA노인복지국 커미셔너와 부회장을 맡은 안명식 전 이북5도민회장이 있다. 또 한국인권문제연 소장을 역임했던 강대인씨(치과의)의 경우 상임고문으로 대선 당시 LA지회를 총지휘했다. 이밖에 윤창기씨(남가주 천주교 평신도협회장) 신영균씨(사업) 권중규씨(치과의)등이 부회장단으로 김무찬씨(사업가)가 이사장으로 당시 후원회를 이끌었다. 김 전 대통령 후원에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LA지회장 김용현씨 이사장 배연원씨(USC)를 중심으로 언론인 김기옥씨 이선주씨 차종환 박사 김인자 변호사 등도 힘을 보탰다. 황제선 전 LA한인회장 조풍언씨 이종원씨 이정씨 정기진씨 오봉균씨 오세봉씨 정제진씨 에드워드 구 호남향우회장 빌 송씨도 지지에 앞장섰다. 이들외에 '가락회'의 마유진 회장도 주요 인맥으로 분류된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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